주말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가족들을 설득해서 한산을 보자 했다. 혼자 보러갈 수도 있었지만, 가족들과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우리 그거 같이 봤잖아?"라고 이야기할 것이 필요했다.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씨네큐 극장을 찾았다. 크고 화려한 극장은 아니지만 그래서 사람이 많이 찾지는 않지만 시트가 꽤나 푹신하고 안락한, 그리고 어딘가 조용한 극장이다.
티멤버십 할인을 받기 위해 매점에서 표를 구매하니 포스터를 쥐어 주었다. 이전과 달리 포스터는 아담했다. 예전과 같이 방문의 절반을 덮을 것 같은 포스터나 방한쪽을 덮은 베티블루37.2 포스터나 그랑블루 포스터를 붙이는 일은 없어서 그런 것이리라 짐작해본다. 애매한 사이즈로 인해 어찌해야할지 용도를 모르고 한구석에 조신하게 뉘어져 있다.
'한산"이 개봉한다고 했을 때 나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 전작인 '명량'은 나에게 감독(김한민)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박살 내었기 때문이다. 내가 명량을 보기로 했었던 이유는 거북선을 제대로 보여주리란 기대도 있었지만, 그걸 재현해낸 감독이 최종병기 활의 감독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통, 같은 감독이 갑자기 다른 색깔의 영화를 만드는 건 어려울 뿐더러 이미 천만 영화라는 성공을 거둔 시리즈의 방향성을 갑자기 바꾼다는 것은 어려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작인 명량과 달리 굉장히 차분하다. 참여한 인물 하나하나의 서사를 지나치게 부각하지도 않고 이전의 명량에서처럼 무작정 비겁한 병사를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물론 예정된 의로운 이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인공적인 슬픔은 있으나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원균을 비난하기는 하나 그나마도 그가 내는 주장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수준이고 뛰어난 명장이 아닌 범부의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누구라도 견딜 수 있을만한 그것이었다.
조선과 왜의 싸움이 아니라 의와 불의의 싸움의 구도 수립은 영리했다. 그 구도는 영화 전체의 개연성을 살리는 훌륭한 밑바탕이 되었다. 또한 무식하고 감정섞인 침략군의 모습도 상당히 지웠다. 똑똑하고 영악하고 욕망에 차 있는 일본 최고의 군인과 이순신의 대결이란 구도는 이순신을 더 돋보일 수 있게 하는 훌륭한 장치가 되었다.
거북선의 개량과 등장은 매우 훌륭했다. 거북선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설이 분분 했는데 거북선이 중간에 개량되었을 것이란 설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는 흥미롭고 재밌었다. 게다가 변신로봇 같지 않은가 말이다?
배우들의 쓰임은 아쉬웠다. 짐작컨대 비슷비슷한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상황에서 유명한 배우들을 기용하지 않으면 구분이 어렵다는 점 때문이라 짐작하지만, 그 정도 출연 시간과 비중 때문에 손현주, 공명, 옥택연 같은 배우들을 굳이 기용할 필요가 있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안성기 배우는 예외로 하자. 난 그저 그의 등장에 감사할 따름이다.)
박해일 배우는 훌륭히 그 자리를 채웠다. 더 빛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은 직전 개봉작인 '헤어질 결심'에서 너무도 큰 존재감을 발휘했기 때문에 그와 비교하여 빛나지 않았다고 느껴진 것 같다. 변요한 배우는 멋지다. 영화 하나를 위해 체중을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이순신에 대적한 스마트한 일본 장수를 이만치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에 찬 눈빛을 연기하는 배우는 많지만 스마트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배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즐거운 영화였다. 여러모로 눈이 즐거운 영화였다. 대사를 듣는 재미는 없었지만, 배우들의 적당하고 과하지 않은 연기와 다이나믹한 전투신은 한국 영화 역사에서 꽤 오래 남을 만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이와 비슷한 톤으로 '노량'이 제작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김윤석의 다이나믹하고 하늘을 찌르는 듯한 거침없음을 볼 수 는 없으리란 사실이 조금 슬프기는 하다. 하지만 이순신과 김윤석이라니........ 너무 재밌는 조합이다.